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로마 제국/역사 (문단 편집) ==== [[안토니누스 피우스]] 시대 ==== 안토니누스는 친가가 갈리아 혈통이나 외가는 오래된 이탈리아 귀족 가문인 사람이다. 부계 가문은 본래 갈리아에서 유래한 아우렐리우스 풀부스 가로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모두 집정관을 지낸 신흥 가문이다. 반면 외가는 그 시작이 공화정 말로 거슬러 가야 될 정도로 오래된 이탈리아 귀족가문인 안토니누스 가로 외할아버지는 집정관을 지낸 유력 이탈리아 세습 귀족이었고 당대 사람 모두에게 성실하고 청렴한 도덕인으로 불린 대정치가 중 한명이었다. 이런 배경을 가진 안토니누스는 아주 어릴 적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가 사별 직후 재혼해, 친가를 떠나 유아기부터 외조부 밑에서 친아들로 자랐다. 따라서 성인이 된 직후, 대를 이어야 할 외가를 정식으로 이어받았고, 성향과 본인 스스로도 친가보다는 외가 사람이라는 인식이 절대적이었다. 그는 유년기에 이탈리아 노빌레스 가 중 부와 권력을 모두 쥔 안토니누스 가문을 이은 후계자가 됐다. 외조부는 외손자의 아버지이자 멘토였는데, 훌륭한 인격자였고 매우 부유한 사람이고 타고난 귀족임에도 솔직함, 검소함, 언행일치된 삶을 중요시하고 이를 죽을 때까지 실천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외조부의 유언과 친가의 재산까지 이어받아 약관의 나이에 로마와 이탈리아에서 가장 부유한 청년이 됐을 때, 안토니누스는 매우 검소하고 고결한 사람으로 자랄 수 있었다. 이런 성장 배경은 안토니누스는 부계 뿌리만 갈리아 혈통인 전형적인 2세기 이탈리아 세습 귀족 중 한명이 되고, 일찍부터 여러 명망가에서 그를 사위 후보로 점찍은 이유가 됐다. 장모는 트라야누스 누나의 외손녀로 하드리아누스 아내 [[비비아 사비나]]의 여동생이고, 아내는 비비아 사비나 황후의 조카 [[대 파우스티나]]였다. 이런 인척 배경에 더해 장인은 당시 하드리아누스와 동서지간이며 복심인 대정치가 안니우스 베루스였다. 이런 이유로 그는 하드리아누스에게 입양되기 전부터, 친척이 거의 없는 트라야누스와 하드리아누스에겐 사실상 가까운 남자인척 중 한명이었다. 안토니누스는 청년 시절부터 관대하고 온건하며 인자한 성품과 매우 도덕적이고 성실한 인품으로 가족, 동료, 상관과 부관, 집안 클리엔테스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까칠하고 엄격한 하드리아누스 역시 안토니누스를 좋아해, 황제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아시아 속주 총독, 집정관 등 요직을 두루 역임했다. 그는 잠시 은퇴를 고려했다가 황제의 이탈리아 행정장관 임명으로 계속 공직생활을 했는데, 하드리아누스의 양자로서 후계자인 아일리우스 카이사르(루키우스 케이오니우스 콤모두스)가 요절하자, 하드리아누스와 긴급 면담을 거쳐 황제의 양자가 되고 그 후계자로 선포됐다. AD 138년 7월 하드리아누스가 사망하고 안토니누스가 황제로 즉위했고 원로원은 경건한 자라는 뜻의 '피우스(Pius)'라는 존칭을 부여하였다. 안토니누스는 평생 속주 순행으로 보낸 전임 하드리아누스와 달리 거의 대부분 로마를 떠나지 않고 통치했다. 그가 평온하게 통치한 이유는 재위기간 내내 침공이 없고, 그가 개인적 야망과 군공에 대한 열망으로 대규모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기 때문도 있으나, 이런 이유보다 이 황제의 통치가 이렇게 흘러간 이유는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시대때 벌어진 방만한 흑자경영에 따른 국고 정상화와 이탈리아, 서방경제 침체 완화 노력을 이유로 한 내정 안정화 조치에 황제가 힘을 쏟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안토니누스의 성실하고 건실한 내치로, 로마 제국은 번영을 이어갔다. 안토니누스는 속주의 부담을 줄이며 재정을 건전하게 하였고 사회정책도 추진하여 그리스도교 박해를 금지시켰으며 대지진으로 파괴된 그리스와 소아시아, 로도스의 도시들을 재건시켰다. 또한 브리타니아에 안토니누스 방벽을 구축하여 국경을 정비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그의 현실안주적인 통치방법은 종종 3세기의 위기 원인으로 지목되어 비판받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하드리아누스의 조치로 벌어진 문무행정 이분화, 군경력자가 아닌 인사들의 행정 기용, 치안판사 제도 개혁에 따른 지나친 효율성 강화 조치 등을 손보는 등의 노력을 했다. 하여 그가 방만하게 현실 안주만 했다면 팍스 로마나는 그 후계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루키우스 베루스 즉위 직후에 완전히 무너져 내렸을 것이라고 평가받는다. 안토니누스는 본래 하드리아누스에게 후계자로 지명될 당시, 처조카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훗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하드리아누스의 양자인 아일리우스 케이오니우스 콤모두스의 아들 루키우스 베루스를 일찌감치 양자로 입양했다. 이때 그는 자신의 막내딸 소 파우스티나를 하드리아누스의 양손자 루키우스 베루스와 결혼시키기로 하고, 처조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루키우스 베루스의 누이 케이오니아와 약혼시키기로 한다. 그러나 즉위 후 그는 후계구도는 바꾸지 않고 배필만 바꿔, 연령대가 비슷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자신의 딸과 결혼시켰고 처조카, 양자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죽기 전 자연스레 권력을 이양하고 잠자듯 서거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